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무의 겨울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사실 1차 대전 당시 [[독일 제국군]]은 루타바가(를 이용한 대용식품)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. 온갖 상상치도 못할 물건들이 [[대체 식품]](ersatz)으로 재탄생되기에 이르렀다. 대표적인 것이 [[치커리]]로 만든 [[대용 커피]][* 일반적으로는 재료를 까맣게 탈 때까지 볶아서 만들었다. 루타바가는 몰라도 치커리는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Coffee_substitute|맛이 진짜 커피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]]. 사실 이 치커리 커피는 원래 유럽에 커피가 들어오기 전에 마시던 음료였고 커피 대용품으로 사용한 건 19세기 [[프랑스]]의 대륙봉쇄령 당시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커피 대용으로 삼은 것이 원조다.]였는데 커피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독일 제국은 [[치커리]]나 [[시금치]], 그리고 [[초콜릿]] 등으로 대용커피를 만들었다. --초콜릿은 대체 어떻게 수입한 거지?-- --[[벨기에 총독부|벨기에를 점령]]하고 있어서-- --차라리 초콜릿을 보급해주지-- 전쟁 말기에는 [[도토리]]를 볶아 [[콜타르]]와 [[설탕]]을 섞어서 커피를 만들기도 했는데 실제로 마셔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고 한다. 그러나 1918년부터는 그것마저 없어서 100% 루타바가로 커피를 만들었고 맛도 끔찍한 수준까지 떨어졌다고. 그리고 [[빵]]은 [[톱밥]]에 소량의 밀가루와 [[콩가루]]를 섞어 만들었으며 하얗게 만들기 위해 [[분필]]가루까지 넣었다.[* 이건 사실 [[중세]] 유럽에서 악덕 상인들이 매우 자주 저지르는 행위였다. [[19세기]] 미국의 식품회사에서도 [[우유]]에 분필가루를 섞기도 했다. 이유는 물 탄 우유의 농도와 색깔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나.] 물론 무진장 딱딱한 데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목재 부산물이 잔뜩 들어 있는 이런 빵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. 이 외에 [[후추]]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[[재]]로 양을 늘렸고 [[기름]]을 얻기 위해 [[개기름|사람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기름]]까지 채취했다. 그리고 [[1917년]] [[가을]]부터는 [[버터]]조차 씨가 마르자 루타바가 전분과 오래되어서 [[응고]]된 [[우유]], 그리고 설탕을 섞은 대용품을 만들었으며[* 비슷한 케이스로 [[나치 독일]] 시절 [[코카콜라]] 독일 지사가 [[환타]]를 만들 때 우유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다 남은 찌꺼기인 유장(乳漿, Buttermilk. 시큼한 맛이 난다)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액체와 [[사과주]]를 빚고 남은 섬유질, 여기에 약간의 과일주스와 [[이산화탄소]]를 넣어서 만들었다고 한다. 그래서 각 병마다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고 하며 이걸 유래로 전후에도 환타는 콜라나 스프라이트와는 달리 다양한 맛을 제공한다. 사실 환타 자체가 대용 [[콜라]]로 탄생한 음료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설탕이 매우 귀해지자 음식에 넣을 설탕이 없어 환타를 대신 집어넣는 가정도 흔했다고 한다.] [[고기]]가 귀해지자 [[쌀]]이나 [[밀]], [[콩]] 등을 이용해서 [[대두단백|고기를 만들었다]]. 사실상 [[서양]]에서 콩고기의 시초가 바로 이 [[제1차 세계 대전]] 당시 [[독일]]의 대용 고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. 그리고 [[1918년]] 말부터는 [[달걀]]마저 없어서 콩과 루타바가, [[옥수수]] 등을 이용해서 인조달걀을 만들었다고 한다. 영양제로 널리 쓰이는 [[클로렐라]]도 이 무렵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.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독일이 단시간에 많은 인구를 먹일 식량을 찾는 와중에 찾아냈고 이후 미국이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. [youtube(lu7TFRnbSjE)] 한편 이 시기의 미군은 최전방으로 건너온 구세군의 에반젤린 부스라는 여성과 11명의 자원봉사자들[* 이들 중에는 당시 16살밖에 되지 않은 '스텔라 영'이라는 소녀도 있었다.]에게 [[도넛]]을 배급받고 있었다. 미군인 이들을 '도넛 걸'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 홍보까지 하며 훗날 미국에서는 이를 기리는 도넛의 날을 만들기까지 했다. 미군은 아이러니하게도 30년 뒤 제2차 세게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[[베를린 봉쇄]]가 벌어지자 물자를 공수하며 대량의 사탕과 초콜릿을 같이 투하해 주었다. 이러한 일화는 미군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고 그 여유로 부식을 어떻게 배급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. [[분류:1916년/사건사고]][[분류:1917년/사건사고]][[분류:1918년/사건사고]][[분류:제1차 세계 대전/사건사고]][[분류:독일 제국의 역사]][[분류:대기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